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되면서 광복을 맞은 우리의 인식과 달리 신생 독립 국가의 자치능력 결여로 신탁통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미국과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영향력 확대를 원하는 소련 간 타협으로 한반도에 38°선이 설정되고, 남과 북에 각각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남쪽에서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미군정기간 동안 철도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었는지 살펴본다.
1945년 9월 1일 미군정청 교통국장에 Ward L. Hamilton 중령이 임명된 후 12월 1일 한국인 김진태(金鎭兌) 국장으로 교체되었으며, 9월 11일 남북 간 철도 운행이 중단되었고(1947년 8월 9일 러시아 열차가 평양~서울 간을 2회 왕복 운행 기록이 남아있음), 남쪽의 철도 현황은 종사원 55,960명(일본인 23,000명 포함 총 79,000명 중), 영업거리 2,642㎞(총 6,362㎞ 중), 동차 포함 기관차 517대(총 1,166대 중), 객차 1,280량(총 2,027량 중), 화차 8,424량(총 15,352량 중), 역 300개소(총 762개소 중)가 운영되었다.
1946년 3월 철도경호를 위하여 철도경찰부가 설치되고, 철도경찰학교와 주요 역에 철도경찰서가 설치되었으며, 5월에는 남한 소재 조선⋅경춘⋅경동 등 사설 철도회사를 국유화하였고, 5월 20일 경성~부산 간 특급열차 조선해방자호 운행이 시작되었으며, 9월 1일 경성~부산 간 무궁화호와 경성~목포 간 삼천리호 급행열차 운행이 시작되었다.
9월 23일 7천여 명의 부산 철도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한 다음 날 전국 철도노동자 4만 명이 합세함에 따라 본국 송환을 기다리는 9,081명의 조선인과 각지 전재민 수용소에 체류 중인 일본인 18,000명의 본국 송환이 지연되고, 철도파업은 출판⋅체신⋅섬유⋅전기 등 전 산업 분야로 확산 전개되었지만, 철도파업은 3년 이상 근무자에 구간 패스(승차권), 20세 이상 5년 이상 근무자는 전선 패스 발행, 휴가와 병가 허용, 급여 인상, 운수부 종사자 쌀 배급량 추가 등을 합의(1946.10.15.일 동아일보)하여 10월 1일 해제되었으며, 파업 중 적색 계열 및 불법 무기 소지자 등 300여 명은 군정 재판에 회부 되었다.
1946년 11월 13일 오후 5시 10분경 서울역발 천안행 통근열차가 영등포역 구내에서 입환 중인 열차와 정면충돌하면서 여기에 실은 천안 기관고로 가져가는 개솔린 3드럼과 산소통 3개가 동시에 폭발하여 기관차 바로 다음 칸의 통학생들이 충돌 순간 38명이 무참하게도 질식하여 불에 타죽고, 부상자가 26명 발생하는 등 대참사가 발생하였다.
1947년 11월 1일 경성역 명칭을 “서울역”으로 변경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서울역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1947년에 들어서면서 석탄 부족으로 열차 운휴가 심각하게 전개되어 11월 24일 딘 군정장관은 그간 만주와 일본에서 수입해왔으나 형편이 여의치 않으니 불편을 참아달라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12월 19일 민희식 운수부장은 일전에는 하와이 석탄 3,000톤이 입수되었는데 앞으로도 계속 도입되도록 추진시킬 예정이라는 발표를 하는 등 석탄 부족으로 열차 운행에 막대한 지장이 있었으며, 12월 24일 동아일보에 의하면 공휴 및 일요일을 제외한 평일 통근열차에 일반여객 승차를 금지하고 있으나 효과가 없어 운수경찰청에서는 “통근열차 불법 승차자 단속주간”을 실시, 엄중하게 단속한다는 신문 기사에서 그 심각함이 느껴진다.
☞ 손길신 전 회장은? 전철운영단장을 끝으로 철도청39년, 철도대학 초빙교수1년, 철도박물관장(2급 정 학예사) 11년을 거쳐 한국철도교통문화협회 명예회장 및 Torah Ware 경영고문으로 레일미디어 편집장을 맡고 있다.
손길신 전 철도박물관장의 철도역사 이야기는 ‘제115화’에서도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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