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이 1899년 프랑스 경의선 부설권을 회수한 후, 일제가 차지하게 될 때까지 이야기를 당시 「주한일본공사관기록」과 「고종시대사」의 기록을 중심으로 간략히 소개한다.
1899년 5월 28일 주한 대리공사 히오키는 일본 아오키 외무대신에게 프랑스공사관 서기관이 극비로 「공사는 일본 지시에 따라 프랑스 회사가 시행하고, 재료 원가에 15%를 가산해주고, 공사비의 5% 지불」 조건으로 경의철도 양도를 희망하며, 프랑스는 정거장 장소를 선정하여 말뚝이라도 세울 작정이라지만 기한연장은 대한정부가 단연 거절하겠지만, 그보다는 독일이 대한에 철도부설을 희망하는 것이 일본에 걸림돌이 될 것 같다고 보고하였다.
1899년 6월 9일 ‘중외신보’등에 경의철도 매각 신청 보도가 번져 프랑스 공사나 본관이 난처해져 추진에 방해가 되겠다는 히오키 공사 보고에, 경성주재 통신원 전보가 신문에 게재된 것이니 주의하라는 외무대신 회신을 받은 히오키는 신문게재 전날까지 어느 신문사에도 전보는 물론, 그럴 시간도 없어 일본에서 누설된 것으로 보인다며, 원래 우리나라(일본) 신문사는 당국 기밀을 탐지하면 출처를 감추기 위해 경성주재 통신원의 전보처럼 조작해서 게재하여 애꿎은 경성주재 통신원이 당하는 일이 적지 않으니 유념해 달라고 보고하였다.
1899년 6월 24일 주한 프랑스 공사는 박제순 외부대신에게 그간 투입비용 대신 프랑스산 철재 구매와 프랑스 기사 채용을 요구했으며, 새로 부설을 허가받은 국내철도용달회사는 이름뿐 거액의 자본금이 있을 리도 없어, 러시아와 독일의 요구 거절을 위한 계책으로 고찰되며, 업무를 총괄하는 박기종은 일본인과 전부터 깊은 관계가 있어, 일본인 우라다에게 선로 측량을 맡길 것으로 예상했고, 1900년 9월 13일 대한제국에 서북철도국이 설치되었다.
1901년 10월 4일 경의철도는 만주 철도와 연결될 긴요한 선로로 부설권을 취득할 수단과 방법의 시급 보고지시를 받은 하야시공사는 경인·경부철도는 잠정 조약에 의한 당연한 것 임에도 매국 행위라 비난하는 현실에서, 드러나게 하는 교섭은 곤란하니 경의철도를 저당으로 경성~송도 간 부설비를 대부 하면서 궤도도 경부철도와 같게 하고, 기간을 제한하여 변제 못 할 때 운전 및 관리권은 물론 전선 부설권을 양도받는 조건으로 하면 대한정부는 자금을 갈망하는 실정이라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보고하였다.
1902년 3월 27일 경의철도 기공식 후, 4월 하야시공사는 유기환 외부대신서리에게 경의철도는 경부선과 더불어 남북을 연락하는 주된 간선으로 양국 이익을 위하여 일본회사와 협력을 제안하였고, 1903년 9월 8일 경의철도 부설권을 일본에서 차관을 약속받은 대한철도회사에 인가하였으며(고종시대사 5집), 1904년 2월 일본 군함이 제물포에서 러시아 군함을 격파하였고, 2월 21일 일본군 참모본부는 경의철도 건설을 위해 임시군용철도감부를 설치한 후, 외부대신에게 군사상 필요하여 경의철도를 부설한다며 대한정부에 편의 제공을 의뢰했으나 외부대신은 회답하지 않고 있었다는 기록이 1904년 3월 4일 고종시대사 6집에 남아 있어, 1899년 이후 일본군이 경의철도 부설 공사를 시작 하기까지의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 손길신 전 회장은? 전철운영단장을 끝으로 철도청39년, 철도대학 초빙교수1년, 철도박물관장(2급 정 학예사) 11년을 거쳐 한국철도교통문화협회 명예회장 및 Torah Ware 경영고문으로 레일미디어 편집장을 맡고 있다.
손길신 전 철도박물관장의 철도역사 이야기는 ‘제113화’에서도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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