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에구치(江口寬治)의 ‘철도 회고록’에는 구서울역 광장에 동상이 세워진 강우규 의사와 관련된 내용이 ‘남대문역두 폭탄’이라는 제목으로 쓰여있어 이를 간추리면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경 신임 사이토 총독이 승차한 마차가 환영인파가 모인 남대문역 귀빈실 앞에 도착하는 순간 조선인 강우규가 투척한 폭탄이 터져 총독은 검대(劍帶 : 칼을 차는 혁대)에 폭탄 파편을 맞아 피해를 면했으나 일본 매일신문 특파원 2명 중 1명은 즉사하고, 나머지 1명도 이로 인해 후에 사망했으며, 일본인 철도국 관리국장은 파편을 맞고, 응급조치를 취했으나 통증으로 조기 퇴직하여 도쿄 자택에서 요양 중 사망하였고, 국장 비서 역시 당시의 부상으로 국장과 비슷한 시기에 사망하여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는 기록이다.
올해가 3.1운동 103주년이니까 지금으로부터 103년 전 이야기인데 사람들이 대부분 알고 있는 것은 강우규 의사가 당시 새로 부임하는 일본 총독을 저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는 정도로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를 간략히 정리해본다.
먼저 1919년은 3.1 독립 만세운동이 시작된 해로 당시 최초의 서울역이었던 서대문역 광장에서 3월 1일 이후에도 계속 사람들이 모여 독립 만세를 외치자 일제는 3월 31일 자로 서대문역을 폐지함에 따라 열차가 남대문역(1923년 경성역으로 역명 변경)까지만 운행되어 통학생들이 어려움을 겪었던 사실이 있었으며, 강우규 의사는 당시 한국이 아닌 중국 지린성 라오허현(吉林省 饒河縣)에 거주하면서 대한민국노인동맹단 라오허현 지부장으로 독립운동을 하던 중 3.1운동 소식을 듣고, 그곳에서 독립선포식을 하고, 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직접 일본 총독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폭탄을 구입하여 서울까지 잠입하셨던 노인이었다.
당시 강우규 의사는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만 64세의 백발의 노인으로, 요즘은 노인이라 할 수 없는 연세지만 필자가 1970년대 철도청 역장으로 근무하면서 50대 직원을 노인으로 대했던 생각을 하면 당시는 극 노인에 해당하는 연세로 지금처럼 교통편도 없던 시절에 중국에서 멀리 서울까지 검거되면 즉시 체포될 폭탄까지 구입하여 소지하고, 잠입하셨다는 사실은 요즈음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목숨을 내건 계획이 아닐 수 없다.
총독 공격에 실패한 강우규 의사는 재공격의 기회를 탐색하던 중 보름 후에 경기도 경찰부 고등계 친일파 형사 김태석(金泰錫)에게 체포되어 재판을 받던 중 1920년 5월 29일 동아일보에 보도된 내용에 의하면 아버지와 함께 기독교 신자인 아들 강중건은 부친의 사형이 결정되었다는 소식에 종로 네거리에서 하늘을 향하여 「주여! 우리 민족도 모든 세계 각국에 있는 각 민족과 같이 행복을 얻게 하여 주소서」라며 소리쳐 기도하다가 종로경찰서에 구속되기도 하였다.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하시기 직전 유언으로 남기신 한시 「단두대상 유재춘풍(斷頭臺上 猶在春風 : 단두대에 홀로서니 춘풍이 감도는구나) 유신무국 기무감상(有身無國 豈無感想 :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는 독립기념관 어록비로 남아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된 후 2011년 9월 2일 구서울역 광장에서 의거 92주년 기념식과 함께 동상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손길신 전 철도박물관장의 철도역사 이야기는 ‘제99화’에서도 이어집니다.
ⓒ 매일건설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매일건설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