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손길신 전 철도박물관장의 철도역사 이야기 ‘제62話’

산업철도 영월선 건설

매일건설신문 | 기사입력 2021/02/22 [08:15]

[기획칼럼] 손길신 전 철도박물관장의 철도역사 이야기 ‘제62話’

산업철도 영월선 건설

매일건설신문 | 입력 : 2021/02/22 [08:15]

 ▲ 영월선 정양터널 공사 현장 모습                © 매일건설신문

 

요즘은 산에 오르면 예전에는 아궁이 땔감으로 쓰기위해 갈퀴로 모두 긁어가 찾아보기 어려웠던 낙엽이 신발이 묻힐 정도로 쌓여있고, 아궁이 장작용으로 나무들을 베어내서 황량하기만 했던 시야를 가릴 정도로 빽빽이 늘어선 나무숲을 보면서 초등학교시절부터 식목일이면 산으로 나무를 심으러 갔던 옛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은 미세먼지 또는 공기질 저하 등으로 눈 밖에 난 석탄이 그때는 산림녹화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대체연료였고, 수력발전을 제외한 화력발전소의 유일한 주인공이었음을 생각해본다.    

  

1949년부터 1952년까지 초대 주한미국대사를 역임한 무쵸(John J. Muccio)대사가 1949년 1월27일 미국 국무장관에게 보낸 1급 비밀문서에 『미국은 정치·경제·군사 면에서 한국을 계속 원조해야 하며, 한국군이 훈련을 완료할 때까지 미군은 주둔해야 하고, 많은 사람들이 북한에서 공급하는 전력이 중단되면 경제는 붕괴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으나 최악의 겨울 상황은 극복되었고, 수개월내에 석탄과 전력 생산량이 개선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어, 산업 생산도 증대할 것으로 판단되며....영월에서 석탄 생산이 증대될 수 있어, 전력 확보는 가능하리라 생각되고....』라는 내용에서 해방 후부터 한국과 미국이 전력(電力)확보를 위한 석탄생산에 의견이 모아졌음을 엿볼 수 있으며, 실제로 미국원조를 받아 대한민국은 최초의 대단위 사업으로 단양, 영암, 영월탄광의 산업선 철도부설계획을 추진한 것이다.

  

1948년11월14일 자유신문은 교통부가 단양탄광선 13㎞, 영주~철암 간 영암선 90㎞, 제천~영월 및 조동까지 영월선 54㎞의 산업철도 부설에 3개년 간 46억 원을 투입하여 완성하는 계획을 세웠다는 보도를 하였으며, 12월28일 동아일보는 특파원이 교통부 총무 및 건설과장과 함께 석탄 매장량이 수 억 톤에 달하는 단양, 삼척, 영월 등 현지를 답사한 결과를 보도하였으며, 해방 후 최초로 한국철도의 기술자들이 직접 계획하고 측량과 설계를 하여 발주한 공사를 한국건설업체가 처음으로 시작한 산업철도건설공사로 1949년 4월 8일 착공했던 영암선은 앞 51화에서 소개한바 있어 두 번째 영월선 이야기를 간략히 정리해본다.

 

영월선은 1937년 7월19일 조선철도주식회사가 충북선 충주부터 제천을 거쳐 영월까지 연장허가를 받았지만(1937년 7월27일 동아일보) 착공하지 못했던 구간으로 1949년 5월 3일 제천~영월 간 영월선 공사를 시작한 후 11월15일 제천~송학 간 9.8㎞의 개통식에는 허정교통부장관을 비롯하여 무쵸주한미국대사, 미국의 대외원조기구인 ECA의 번즈박사 등이 참석하여 성대히 거행되었으며, 1950년 4월 8일 자유신문에 각 공구의 공사단가 인상안이 국무회의에 통과된 사실이 보도된 후 6.25전쟁 발발로 모든 공사가 중단되었다.

 

1952년10월15일 영월선공사를 재 착공한 후 12월25일에는 우리기술자들이 최초로 설계하고 시공한 철도터널로 알려진 쌍용~입석리 간의 입석터널이 완공되었고, 1953년 9월 1일 송학~쌍용 간, 1955년 9월10일 쌍용~연당 간, 1956년 1월17일 연당~영월 간 개통으로 제천~영월 간 영월선 전 구간이 개통된 후 함백까지 연장공사를 이어나가 1957년 3월9일 영월~함백 간 이 개통되면서 영월선은 제천~함백 간 함백선으로 개칭되었다.

 

▶ 손길신 전 철도박물관장의 철도역사 이야기는 ‘제63화’에서도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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