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손길신 前 철도박물관장의 철도歷史 이야기 「제24話」한국철도를 위탁 운영한 남만주철도주식회사
남만주철도주식회사는 러일전쟁에 따른 포츠머스강화조약으로 러시아가1896년 이후 청국에서 확보한 특권을 일본이 양도받은 것 중 동청철도 중간 하얼빈~뤼순 간 남부지선의 일부 인 창춘(長春)~뤼순(旅順) 간 남만철도와 그 지역 관리를 위해 1906년 설립하여 1945년 종전까지 철도사업을 중심으로 광업, 제조업, 호텔업 등 각종 사업과 만주지역 정치, 군사, 경제, 문화 등 각 방면에 걸친 식민사업 수행의 핵심기관 역할을 한 일본의 국책회사였다.
일왕 히로히토에게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 후 체포되어 사형당한 이봉창의사가 남만주철도 종사원이었다는 역사기록으로 만주철도에서 근무하셨나? 하는 질문을 가끔 받는데 만철(滿鐵)이라고도 불리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는 일제가 1917년 7월31일부터 1925년 4월 1일까지 한국 국유철도의 건설, 개량, 보존 등 운영을 위탁하여 당시 모든 종사원이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소속이 된 것이며, 이봉창의사는 이 시기에 용산소재 기관차사무소에서 근무하면서 항일단체 금정청년회를 조직하여 총무로 활동했던 철도원출신 독립운동가였다. 한국철도 역사 중 만철이 운영한 7년 8개월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철도역사 이야기라 생각된다.
일제의 가장 큰 목표가 대륙진출이었기 때문에 위탁운영을 시작한 첫해 9월 일본에서 한국철도를 경유하여 중국까지 소화물 운송을 시작했으며, 10월에는 부산에서 중국 봉천까지 직통열차를 증설하였고, 1918년 초에는 열차 내에 서고(書庫)를 비치하여 1, 2등실 여객은 서고에 비치된 책을 볼 수 있도록 하였으며, 5월에는 2, 3등실 만 운행되던 경원선에 1등실 객차를 연결하여 운행을 시작하였고, 7월에는 금강산 장안사호텔 영업을 시작하기도 하였다.
당시 최초의 서울(경성)역 인 서대문역 주변에는 각국의 공사 및 영사관과 각 급 학교가 집결되어 위치함에 따라 1919년 3월 1일 시작된 독립만세운동 때 학생들 집결지가 자연스럽게 서대문역 광장이 이용되었으며, 3월 5일 2차 독립만세운동 집결지가 또다시 서대문역 광장이 선정됨에 따라 조선총독부와 만철은 서대문역 폐지를 결정하고 3월31일자로 폐지함에 따라 많은 통학생들이 불편을 격어야 되었다는 보도가 당시 신문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1919년 4월에는 1905년 인천에 개교된 ‘철도관리양성소’를 용산으로 이전하여 운전, 역무, 토목 본과를 3년제 ‘경성철도학교’로 개교하고, 한국철도를 위탁운영한 첫해(1917년) 이익금 135만원 중 65만원을 학교 신축자금으로 투입하여 1920년 경성철도학교(구 용산 교통부청사 본관)를 신축하였으며, 부속 만철경성도서관(1925년 철도도서관으로 개칭)을 개설하여 장서 6천여 권을 비치하기도 하였다.
또한 용산역~신의주역 간 경의선을 1921년 신촌역을 신설함으로서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 ~신의주역 간으로 노선을 변경하여 7월11일부터 운행을 시작하였으며, 11월에는 조선호텔(당시 철도에서 운영)에서도 승차권 발매와 소화물 발송취급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922년 6월 남대문역 신축공사를 착공하고(1925.09.30. 준공) 다음해 역명을 경성역으로 변경하였으며, 평양의 구 유옥여관을 매수하여 평양호텔로 영업을 개시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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