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註):본지는 철도가 지닌 특별한 역사(歷史)성 즉 이 나라가 겪은 격변의 시대를 단순히 교통 운송 수단이 아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숨결 같은 존재이기에, 또 철도史가 잘못 알려진 보편적 오류들이 한국사 안에서도 많아, 철도교통문화협회 명예회장인 손길신 前 코레일 철도박물관장을 통해 바로잡고자 연속해 기획 시리즈를 연재한다.
공사 중 노선문제로 인한 갈등도 많이 노출되었다.
예로 철도원이 우회 요청한 수원지구 사도세자(장조)와 헌경왕후 융릉과 정조와 효의왕후의 건릉이 있는 화산릉과 안산(案山) 사이를 지나는 노선은 20여만원의 추가소요 공사비로 4개월여를 끌다가 지관(地官) 길영수가 풍수학상 지장이 없다고 결론지음에 따라 공사가 진행됐었다.
하지만 정조대왕이 매년 참배를 위해 오가는 도중 멈추어 화산쪽을 바라보며 슬퍼하였던 지지대(遲遲臺)고개 터널문제는 대한 정부측 반대뿐만 아니라 수원시민들의 반대 시위 등으로 어쩔 수 없이 공사비 증가를 감수하면서 우회선을 채택하기도 하였다.
당시 건설인부 노임 지불 화폐는 일화와 대한 엽전이었는데, 일화 30원은 대한 엽전으로는 30관(112.5㎏)이 넘어 많은 돈을 공사현장까지 운반하는 것이 큰 부담이 되어 한전증표(韓錢證票)로 십문(拾文), 오십문, 백문, 이백문, 오백문, 일관문(壹貫文) 등 6종을 발행하여 영동이남 각 지방에 유통되었지만 대한화폐유통에 큰 혼란을 초래하였으며, 경부철도 속성지령에 따른 참가 도급업자의 증가로 일화가 많이 통용케 되면서 한전증표는 회수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이 임박 해지자 1903년12월 2일 경부철도 속성명령을 내리고, 경부철도회사 조직을 총재이하 간부임원은 관선(官選)으로 개편하고, 그 달 28일 추밀원회의에서 회사발행 채권에 대한 정부의 원리금 지불보증과 보조를 결정하고 「경부철도속성 보조 및 책임지출에 관한 자순(諮詢)안」이 칙령으로 공포되어, 늦어도 1904년12월31일 까지 영등포~초량간 전 선로 개통을 명령하였다.
난공사 구간인 밀양 북쪽은 성현의 준령으로 막혀 터널공사용 재료운반이 불가능함에 따라 연장 약 5.7㎞구간에 8개의 스위치백으로 터널의 남・북 양 입구에서 본선과 연결되는 우회 가선을 설계하고, 약 2개월에 걸쳐 인부 2만 여명을 투입하여 1904년 6월 7일 스윗치백 가선 부설을 완료하였지만 급구배와 위험한 절벽 등으로 1회 6량 이내의 화차를 연결하여 서행 주의운전으로 하루 30회 이상을 운행하여 자재를 운반함에 따라 터널을 준공할 수 있었다.
경부철도는 1904년11월10일 초량~영등포간 완공되었다. 스웨덴 기자 William Andersson Grebst 는 그의 여행기「I Korea(한국 번역서 ‘스웨덴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에 1904년12월 24일 한국에 도착하여 공식 개통되기 전 경부철도 첫 승객이 된 경험을 기록하였다.
이 기록에 의하면 열차는 대구에서 하룻밤을 자기도 했고, 수원을 지나 도중에서 기관차 물이 모자라 선로 옆 급수탑에 도착했으나 급수탑은 얼고 물이 없어 열차 운행이 많은 시간 지연될 것이 예측되어 도중에서 열차를 포기하고 민가에 들려 말을 빌려 타고 영등포역에 도착하여 경인철도 1등 칸을 타고 서울에 도착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었다.
☞ 손길신 前 철도박물관장의 철도歷史 이야기 「제8話」에서도 이어집니다.
<저작권자 ⓒ 매일건설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철도교통문화협회 손길신 명예회장(前 코레일 철도박물관장) 관련기사목록
|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