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손길신 전 철도박물관장의 철도역사 이야기 ‘제63話’최초 서울(京城)역이었던 서대문역이 폐지된 이유
1900년 7월 8일 경인철도 인천~경성 간 전구간이 개통되면서 영업을 시작한 경성역(京城驛 : 서양인은 처음부터 Seoul-Station이라 함)을 당시 한성부민(漢城府民 : 서울시민)들은 서대문(새문 또는 新門이라고도 함) 가까이 있어 신문외역(新門外驛 : 1900.11.13.황성신문) 또는 서대문역으로 부르게 됨에 따라 1905년 3월27일부터 서대문역으로 변경(1905. 4.1.황성신문)했지만 서양인들은 전과 같이 Seoul-Station이라고 하였으며(1906년 9월 독일인여행가 Herman Sander의 여행기), 주변에 외국공관과 외국인을 위한 호텔 및 학교 등이 위치하고 있어 주요한 역이었다.
1917년11월18일자 부산일보에는 명년부터 5개년 간 계속사업으로 총 96,796,218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진해~창원 간 철도부설과 경부선을 개량하고, 남대문역을 개축하야 경의선 시발역으로 변경하고, 서대문역을 경유하여 수색역으로 직통하는 연결선을 건설함으로서 한성에서 경의선을 이용하기 위해 용산역으로 내려가야 하는 불편을 해소할 수 있는 조선철도건설 개량사업을 시작할 것이며, 첫해 예산을 975만원으로 결정했다는 기사를 게재하였다.
그런데 1919년 3월18일자 매일신보에 『서대문역을 남대문~수색 간 직통공사 기타 관계상 3월31일 폐쇄한다.』는 기사가 보도되었으며, 4월 5일자 매일신보에는 『서대문역은 3월31일 오후 9시59분에 도착한 마지막열차가 승객 11명을 내려주고, 오후10시10분 승객32명을 태우고 인천역을 향해 마지막으로 열차가 출발하였다며, 서대문역 다카하시(高橋) 조역(지금의 부역장)은 인터뷰에서 4월15일까지 잔무를 처리한 후 9명의 직원은 다른 역으로 전근이 결정되었다며, 인천에서 통학생이 일백 수 십 명인데, 남대문역에서 내리면 학교가 멀어져 불편할 것과 주변 상점들이 한산해질 것을 걱정하면서, 미국인 콜브란이 아메리카소나무와 벚나무를 가져와 지은 역인데 아쉽게 되었다.』는 소감을 보도하였다.
경의선 개량은 남대문역을 시발하여 서대문역 경유 수색역으로 연결한다는 애당초의 계획과 달리 갑자기 서대문역의 폐쇄가 결정되었다는 신문보도에 이어 경의선 개량공사는 시작도 하지 않았음에도 곧바로 폐쇄시킨 이유가 경의선 노선변경 공사 때문이 아님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며, 3월 1일부터 전국각지와 해외까지 번진 독립만세 운동으로 인한 결과이기에, 2021년 102번째 3.1절을 보내면서 당시 상황을 짚어본다.
본래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기로 학생들과 합의했으나 시민과 학생들이 비폭력 원칙을 못 지킬 경우 역효과를 우려하여 태화관으로 변경함에 따라 학생들이 집결한 장소는 서대문역 광장이 되었으며, 3월 1일에 이어 3월 5일도 서대문역 광장에 모여 시위를 하였고, 천도교계열 보성사(普成社)에서 1931년 3월 1일 창간한 조선독립신문 제8호에 실린 독립선언 민족대표에 대한 일제의 판결문 중 “3월22일 남대문밖에서 500여명이 독립운동 축하행렬을 시작하여 서대문역에서 수천의 응원대와 합하여 주마질풍(走馬疾風)의 세로 불란서영사관에 이르러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고 그 행렬은 극에 달했다“는 내용에서 경의선 노선변경과 관계없이 만세운동 저지를 위하여 서대문역을 없앴던 이유를 되새겨본다.
▶ 손길신 전 철도박물관장의 철도역사 이야기는 ‘제64화’에서도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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