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손길신 前철도박물관장의 철도歷史 이야기<제5話>

“경부철도 부설이 허가되기까지”

매일건설신문 | 기사입력 2018/09/20 [12:07]

[기획칼럼]손길신 前철도박물관장의 철도歷史 이야기<제5話>

“경부철도 부설이 허가되기까지”

매일건설신문 | 입력 : 2018/09/20 [12:07]

편집자 주(註):본지는 철도가 지닌 특별한 역사(歷史)성 즉 이 나라가 구한말 겪은 격변의 시대를 단순히 교통 운송 수단이 아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숨결 같은 존재이기에, 또 철도史가 잘못 알려진 보편적 오류들이 한국사 안에서도 많아, 철도교통문화협회 명예회장인 손길신 前 코레일 철도박물관장을 통해 바로잡고자 연속해 기획 시리즈를 연재한다. 


 

한국철도에 초기부터 근무했던 일본인 에구치(江口寬治) 회고록에 의하면 경인철도 아시다찌(足立)총지배인이 한강변에 개통기념비 건립을 추진하려다 민심 동요를 우려해 포기했다는 이야기는 당시 한국인의 반일감정에 민감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럼에도 경부철도 부설로 이어진  당시의 한일 간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살펴봄으로서, 막연하게 일본이 마음대로 이 땅에 철도를 부설한 것으로 잘못 이해하는 오류를 방지하고, 대한제국 정부로서는 최선의 방어를 했지만 약소국가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었음을 이해하기 위하여 당시의 과정을 간략히 정리해본다.  

 

일본은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이후 1880년대부터 경부철도노선 선정을 위한 답사를 시작하였다.


1892년 8월 이노우에(井上勝) 철도국장 지시를 받은 고노(河野天瑞)는 인동-선산-상주-보은-청주-진천-안성 경유 노선을 선정 보고한바 있다.  

 

1894년 체결한 ‘한일잠정합동조관’에 따라 일본 승낙 없이는 한국에 철도부설은 못한다고 자신한 일본은 철도기감 센고쿠(仙石貢)의 청주-진천-안성 경유 경부철도노선 등을 검토하고 있었다.

 

하지만 1896년 경인철도 특허와 프랑스,러시아,영국의 철도 부설권 교섭에 다급해진 일본은 1896년 4월17일 일본승인 없는 경인철도부설 허가는 한일잠정합동조관 위반이라며 해명 요구에

 - 4월26일 체결 후 3년이나 경과했고, 유효기간도 없는 조관을 타국에 적용할 수 없다고 회신,

  

 ▶4월26일 경부철도 및 관련 선로 허가는 일본정부 사전 승낙이 필요하다는 외교서한 발송에

- 4월29일 한국은 경부철도 건설에 일본의 사전 승인필요 외교서한에 대한 이의를 제기했고,

 

 ▶5월12일 일본은 각계각층의 실업인 등을 모아 ‘경부철도주식회사발기인회’를 구성하고,

   7월08일 경부철도 부설권을 허가하는 정약(定約)의 체결을 촉구하고,

   8월10일 일본 실업인과 경부철도 부설조약 체결을 촉구하며, 조약안 공람 및 부설허가 요구에

 

- 8월15일 한국은 경부철도 부설허가 취소와 ‘동 약안(同 約案)을 퇴송한다고 회답

 

▶8월28일 경부철도 부설허가 재요청 및 동 약안 재 발송 및 9월21일 독촉, 10월 2일 재 독촉

  - 10월03일 경부철도 부설계약은 폭도(義兵運動을 가리킴) 평정 시 까지 보류한다고 통보

 

▶10월04일 경부철도 부설허가 문제에 대한 항의와 정약 체결 재촉 및 11월06일 재고 요청,

▶11월16일 ‘향후 1년간 철도조약 불허한다’는 대한황제 조칙(詔勅) 반포에 대한 항의와 재고 요청

 - 11월20일 경부철도 부설권 불허 통보에, 11월21일 경부철도 부설허가 강요

 

▶1897년 1월27일 경부철도부설을 강요하는 서류를 반송하자 2월 4일 반송된 서류를 재 발송했고,

   - 8월24일 끊임없는 강요와 협박에 한국정부는 경부철도부설권을 일본회사에 특허했다.

 

▶1898년 2월 경부철도발기위원인 오오에다쿠(大江卓)는 경부철도 예정선로의 답사를 시작했고,

   8월30일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가 경부철도부설허가 지원을 위하여 내한한 후

   9월08일 경부철도합동조약이 체결된다.

 

▶1899년 2월 오오에다쿠는 각 노선을 비교 연구하여 논산-공주를 경유하는 노선을 선정하였고, 1900년 3월 기사장 카사이아이지로(笠井愛次郞)는 그간 답사보고 기초로 최종노선 확정.

 

필자는 수년 전 부산 수정산 계곡에서 발견된 ‘경부철도용지’ 표지석 검토요청에 “본래 계획은 구덕산 터널을 뚫고 용두산을 거쳐 남쪽 바닷가에 해륙연락역(海陸連絡驛)을 건설하려했고, 표지석 발견 장소는 선로 통과지역이었으나 구덕산 터널공사를 피하기 위하여 동쪽 범천동 쪽으로 변경하여 초량을 종착역으로 하였다”는 답변을 한 적이 있다.

▲ 수정산 등산객이 발견한 표지석     © 매일건설신문

 

10월03일 경부철도발기인총회는 자본금을 2,500만원으로 결정하고 주주모집을 시작하였으며, 일부 한국인들도 주주명단에 올랐다.

 

1901년 6월25일 도쿄에서 경부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위의 요약된 내용을 통해서 일본에 경부철도 부설허가 자체를 원하지 않았으나 끈질긴 관민합동 모사에 약소국가인 대한제국은 어쩔 수 없이 부설을 허가하게 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 손길신 前 철도박물관장의 철도歷史 이야기 「제6話」에서도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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